지난달 방문했던 부평향교에 이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인천의 도심 속 역사 명소를 또 한 번 찾아가 봤습니다!
그곳은 바로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관아의 건물이자
조선의 성군 정조대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평도호부청사입니다.
인천지하철 1호선 계산역 3번 출구를 나서
골목을 100m 가량 걷다 보면
도심 건물 사이로 고즈넉한 옛 돌담과 기와지붕이 보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노는 소리를
귀 기울여 따라가다 보면
부평초등학교 정문 옆으로 작은 한옥문이 있습니다.
이 문이 바로 오늘 찾은
부평도호부관아로 들어서는 문입니다!
부평도호부관아는 고려와 조선시대 군사요충지나
일부 일반 행정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기구를 말합니다.
부평도호부는 1413년부터 인천 계양구와 부평구,
경기도 부천, 서울시 구로구 일부 지역을 관할했으며
1895년 갑오개혁으로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된 이후
인천부로 편입됐다고 합니다.
부평도호부청사의 문화재는
부평도호부관아와 어사대, 욕은지, 계산동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비록 문화재로 선정되지는 않았지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부평부사 선정비는
인조 6년(1628년)과 고종 22년(1885년) 사이
역대 부평부사 중 선한 정치를 펼친 인물들을 선정한 비석 21구입니다.
본래 24구가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딱딱한 돌로 된 오래된 차디찬 비석이지만
군자와 선비의 강직함이 풍기는 기품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부평부사 선정비 맞은편에는
부평도호부청사에서 소개할 첫 번째 문화재인
계산동 은행나무가 보입니다.
인천시 기념물 제11호로
수령이 500년이 넘는 도호부의 풍치목으로 추정됩니다.
은행나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위치해 있고
부평도호부청사에서는 울타리가 있어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아직 잎이 다 돋아나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부평도호부청사를 품은 채
한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올곧음과 강직함이 느껴지는 풍모였습니다.
그다음 보이는 문화재는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3호인
어사대입니다.
계산동 은행나무와 욕은지 사이에 위치한 어사대는
'왕이 활을 쏜 곳'이라는 의미로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대왕이 1797년 부평도호부를 방문해
욕은지에서 활을 쏘며 여흥을 즐긴 것을 기념으로 세운 표지석입니다.
돌을 쌓아 만든
가로 18m, 세로 16m 크기의 욕은지는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1호입니다.
한가운데 지름 5m가량의 돌산이 있고
돌산까지는 돌다리가 놓여있습니다.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정조가 김포에 있는 장릉(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왕비 인현왕후 구 씨의 능)에 참배하고
부평을 경유해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 현릉원으로 행차할 때
부평도호부에 머무는 동안 어사대에서 활을 쏘고 욕은지에서 산책하거나 손을 씻었다고 합니다.
욕은지와 어사대는 원래 지금의 자리에서 약간 동쪽에 있었지만
고종 24년(1887년) 현재 위치로 옮기면서 보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우측으로는 마지막 문화재인
부평도호부관아가 있습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부평도호부 내아의 일부로 추정됩니다.
숙종 3년(1677년) 중수한 부평도호부관아는
원래 동헌 (지방 관아에서 고을 원이나 감사, 병사, 수사 및 그 밖의 수령들이 공사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과
객사 (고려,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해 외국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한 숙소),
내아 (조선시대 지방 관아에 있던 안채) 등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규모였지만
1909년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건물 대부분을 헐고
이 건물만 학교 부지 옆으로 옮겼고,
원래 'ㄱ'자형이었지만 1968년 현재 위치로 다시 옮기면서
'ㅡ'자형 건물로 개조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현재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부평도호부와 계양의 연혁, 변천사, 보수 현황, 문화유산, 역사의 인물 등을
다양한 사진과 고지도, 사료들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는 수령의 지휘 아래 지방행정을 담당하던 곳으로
고지도에 나타난 부평도호부는
처음 건립된 시기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부평이 도호부로 승격된 1413년을 전후한 시기에
현재의 위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 당시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몇몇 고지도에 부평도호부관아의 주요 건물 몇 채가 표시돼 있어
위치와 옛 모습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양의 역사적인 인물도 안내하고 있습니다.
고려 개국공신 이희목과 여진을 정벌한 윤관, 명판관 손변,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 전란에서 성현의 위패를 지켜낸 송윤 등을
계양 태생, 지방관, 거주민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로 소개합니다.
앞서 구경한 부평도호부의 문화유산들에 대해서도 소개합니다.
정조가 행차했을 때 거닐었다는 욕은지와 활을 쐈다는 어사대의 표석
그리고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와
역대 부평도호부와 관찰사의 선정비가 그것입니다.
부평도호부청사는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 내아의 일부로 추정되는 건물 한 채와 욕은지,
어사대 표석만 남아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해지는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남은 한 채마저
그 위치가 100m 동쪽으로 옮겨지고
형태도 'ㄱ'에서 'ㅡ'로 변형되었다고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양과 부평도호부의 연혁 역시
2쪽 벽면을 할애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양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주부토군을 설치(475년)한 이래
통일신라시대에는 장제군,
고려시대에는 수주-안남도호부-계양도호부-길주목-부평부로 바뀌었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부평도호부가 되었습니다.
이후 경기우도의 계수관으로 현재의 인천시 대부분과
김포, 부천, 고양, 시흥, 안산, 서울의 서부지역까지
관할하는 넓은 지역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부평도호부의 옛 모습과 보수 현황에 대해서도
상세히 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훼손으로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1871년 편찬된 <부평부읍지>에 부평도호부관아의 주요 건물명과
규모(총 232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
계양구에서는 문헌기록과 1910년대 지적원도, 고지도, 유사사례비교 등을 통해
과거 부평도호부의 영역과 관아 배치 등을 추정하고
장기 복원 정비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천과 경기도는 물론 서울 서부권역까지 다스렸던
한 때 대단한 위세의 부평도호부청사가
현재는 초등학교의 한편으로 밀려나고
그 넓지 않은 남은 공간을 돌아보는 데에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부평향교에 이어 부평도호부청사의
역사와 이야기를 돌아보며
수십 년을 계양구에 살면서도 몰랐던
수백 년간 벌어진 이 지역의 흥망성쇠에 대해 알게 된
의미 있고 뜻깊은 시간 여행이었습니다!
★ 체크 포인트
- 주소 인천시 계양구 어사대로 20
- 연락처 032-450-5826
- 관람 하절기(3~10월) 10:00~19:00 / 동절기(11~2월) 10:00~18:00
- 입장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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